강원도내 폐광지역 역사에서 사북항쟁은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1980년 4월 21일 정선 사북에 위치한 동원탄좌에서는 광부들의 싸움이 시작됐다. 당시 정선 사북에서 근무하던 광부와 그들의 가족, 지역 주민들까지 모두 노동인권 개선과 부당한 국가 공권력에 대항했던 사북항쟁이다.
광부를 중심으로 한 폐광지역은 노동자를 압박하는 임금체계와 사주의 횡령, 어용노조, 정부와의 유착 관계를 비판하고 나섰다. 동원탄좌 뿐 아니라 당시 탄광지역에서 근무하던 광부들의 임금체계는 대부분 도급제로 석탄 채굴량에 비례해 임금을 책정해 받았다. 회사 측은 채굴량을 측정하는 검탄 시 채굴량을 적게 계산해 광부들의 임금을 낮게 책정했고, 생산량과 채굴량 간에 발생하는 차익을 회사에서 횡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 때문에 광부들은 항상 채굴량에 대한 압박을 받아야 했고, 이는 곧바로 재해로 이어졌다.
석탄합리화사업단 통계결과 1970년, 1980년대에는 매년 작업장에서는 200명에 가까운 광부들이 산업재해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는데 기록되지 않은 광부들까지 하면 매년 상당한 수의 인원들이 광산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회사 측은 사내 비밀 경찰인 암행독찰대를 운영하며 광부들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노동조합의 운영에도 개입했다. 광부들의 권익과 생활 복지를 지원해야 하는 노동조합은 회사와 유착해 회사의 편의를 도모하고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조직이 됐다. 결국 광부들은 4월21일 제대로 된 임금체계 확립과 근무환경 개선, 노조 지부장 사퇴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이때 노조원을 감시하던 사복 경찰관들이 현장에서 도주하다 경찰차로 광부들을 깔고 지나간 사건이 발생, 이를 도화선으로 사북항쟁은 시위를 넘어선 항쟁으로 발전하게 됐다.
당시 동원탄좌 노조 대의원을 맡고 있었으며 사북항쟁에 참여해 주된 역할을 하고 사북민주항쟁동지회장을 역임했던 이원갑(83)씨는 사북항쟁에 대해 사회적으로 소외받던 광부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진행했던 투쟁이라고 설명했다.
이원갑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당시 광부들은 대부분 배우지 못하거나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많았다”며 “회사는 이런 점을 오히려 악용해 인권을 유린하고 임금을 착취, 여기에 반발해 일어난 게 사북항쟁”이라고 말했다.
사북항쟁은 4월21일 시작해 나흘간 이어졌다. 4월22일에는 광부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병력이 투입됐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경찰인력 및 시위대 여러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사태 악화를 우려한 계엄당국은 노사정 협상을 시작했고, 노사정 대표가 11개 조항의 합의사항을 발표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당시 노사정 협상에 참여한 이원갑 씨는 “당시 광부들의 임금체계 및 근무환경 개선과 더불어 ‘이번 사태 수습에 절대 경찰이 실력행사를 하지 않는다’와 ‘회사와 당국이 최대의 노력으로 원만히 해결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계엄 합동수사단은 5월6일 주모자 검거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사북항쟁 관련자 연행 작전에 나섰다. 사북항쟁이 폭력사태로 이어지게 된 배경에 배후조직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이원갑 씨를 포함해 당시 사북항쟁에 참여했던 광부, 그들의 가족들은 경찰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결국 이원갑씨는 사북항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선고를 받았던 시점에 이미 이 씨는 1년 5개월을 복역한 상태였다. 1982년에 출소한 이원갑 씨는 사북항쟁 주동자라는 꼬리표 탓에 도내 어느 탄광에서 입사할 수 없었다.
이원갑 씨는 “당시 정선에는 동원탄좌와 연관이 없는 탄광을 찾을 수 없었고, 다른 지역의 탄광들 역시 사북항쟁 주동자라는 꼬리표 탓에 채용을 거부했다”며 “당시 아이들의 교육도 제대로 못 시켜준 것이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출처 : 강원도민일보(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178909)